
칠레를 비롯한 와인 대표 생산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힘입어 2000년대를 시작, 우리나라 와인시장은 뚜렷한 성장세를 보였으나 여전히 대중화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높은 가격 때문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모임 자리에 위스키와 프리미엄 증류주가 너무도 흔하게 올라온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진입장벽이다. 와인이 식탁에 올라오면 왠지 먹을 때 지켜야 하는 규칙이나 매너가 있어야 할 것 같고, 괜히 아는 척을 하다가 망신을 당할까 싶기도 한 마음이 든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를 과시하기 위해 와인을 즐겨왔던 과거 문화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연말연시가 되면 와인 한 병으로 분위기를 내고 싶어 하는 수요가 많다. 하지만, 기다란 유리병 수백 개가 제각기 다른 가격, 라벨을 매단 채 맞이하는 와인 코너를 가게 되면 골치가 아파지기 마련이다.
또 정작 집에서 한잔 마셔 보려고 하니,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와인의 ‘와’자도 모르는 독자를 위해 퇴근 길에 한 병 골라 집, 모임 등 다양한 곳에서 조금 더 풍성하고 즐겁게 와인을 즐길 수 있도록 필자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와 팁을 공유하고자 한다.
<신세계 VS 구세계>

시작하기에 앞서 필자가 말하는 ‘신세계’는 백화점 이름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와인 원산지는 크게 구세계(舊世界, Old World) 와 신세계(新世界, New World)로 나뉜다.
구세계 와인은 전통적인 와인 생산 지역을 의미하며, 주로 유럽과 그 주변 국가들에서 생산된 와인을 가리킨다. 구세계 와인 생산지로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포르투갈, 그리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이 있다. 구세계 와인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와인 생산에 있어 더 많은 규제와 고유의 스타일을 따르는 경향을 보인다.
반대로 신세계 와인은 와인 생산이 상대적으로 최근에 발전한 지역에서 만들어진 와인을 말한다. 신세계 와인 생산지로는 주로 미국, 아르헨티나, 칠레, 호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뉴질랜드, 브라질 등지에서 생산된 와인으로, 마트나 와인 전문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와인 하면 프랑스가 떠오르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구세계 와인의 경우 선택하는데 앞서 사전에 숙지하고, 공부해야 할 정보가 많다. 프랑스 와인의 라벨을 보게 되면 포도의 품종, 와인의 특성 보다는 와인 농가 명이나 재배되는 지역의 이름으로 라벨링이 되어 있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 지역 또한 경상도, 충청도와 같은 큰 지역 단위 보다는, 울산광역시 동구 전하동, 혹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1동 ㅇㅇ아파트와 같이 세부화 되어 있다. 한국 사람이, 특히 와인 초보가 프랑스의 동네 별 와인 특성을 사전에 알고 선택할 수 있기는 쉽지 않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프랑스 마을 별 와인의 특성과 본인의 취향을 알고 있다면, 필자의 글을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으니 뒤로 가기를 눌러도 좋다.

필자가 동 주제에서 중점 소재로 다루고 싶은 건 신세계 와인이다. 전통은 상대적으로 짧아도, 맛이나 포도 품종의 품질은 400년 전통의 프랑스 와인 농가 조차도 명함을 못 내미는 경우들이 있다. 실제로 고작 (?) 병당 60만원 정도의 미국 ‘오퍼스 원’이 병당 400만원을 호가하는 프랑스의 ‘샤토 무똥 로칠드’ 와인을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이긴 사례가 있으니 말이다.
와인의 ‘와’자를 모르는 상태의 독자라면, 우선 신세계(호주, 칠레, 아르헨티나, 미국) 와인 코너로 가볼 것을 권한다. 본인의 취향에 따라 묵직하고 도수가 높은 와인을 선호한다면 Malbec이나 Cabernet Sauvignon, 가볍고 시원하게 맥주처럼 즐기고 싶은 날에는 Sauvignon Blanc이나 Chardonnay 포도 품종이 적힌 화이트 와인을 고르면 좋다. 2~6만원 정도 선에서 마음에 드는 한 놈 고르게 된다면, 크게 실패할 일은 없다고 본다.
*신세계 와인 중 라벨에 음식이나 동물 사진이 그려진 경우들이 더러 있다. 생선이 그려진 와인은 생선과 페어링이 훌륭하다는 뜻이고, 닭이 그려진 와인은 닭고기와의 궁합이 훌륭하다는 뜻으로 라벨에 그려진 동물이나 음식을 보고 그날 식사에 맞추어 구매를 하는 방법도 괜찮다
<10분의 기다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휘황찬란하게 생긴 유리 병에 와인을 가득 부어놓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디캔터 (Decanter)’를 활용하여 와인이 숨을 쉬게 도와주는 것인데 (*와인 에어레이션, Wine Aeration), 디캔터의 경우 대다수 가정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 뿐더러 세척 등 관리가 어렵기에 구매를 추천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 작업은 그저 남들 앞에서 멋있어 보이기 위해 하는 행위는 아니다. 짧게는 1~2년, 길게는 수십년 간 유리병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한 와인은 본연의 맛을 뽐내기 위해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에어레이션은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디캔터’ (자동제세동기)가 없어도 누구나 와인에 숨을 불어넣을 수 있다. 식사 10분 전, 미리 잔을 채워 보도록 하자. 10분의 기다림 끝에 식사를 시작할 즈음 더욱 풍성해진 와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에어레이션 전 후를 비교하며 와인을 음미해보는 것 또한 와인을 즐길 수 있는 하나의 재미 요소다. 갓 따른 와인을 먼저 한 모금 음미해본 후, 10분 뒤에 같은 잔을 다시 한 모금 음미해보게 되면, 각 와인이 간직하고 있는 고유의 산미, 향을 훨씬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잔을 식탁 위에 올려둔 채 가볍게 돌려주는 스월링 과정을 거치게 되면 시간을 아낄 수 있다
*화이트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은 에어레이션 과정을 생략한다
<와인으로 취하는 날>
여러 병을 마시게 될 경우에는 어떠한 순서로 마시는 것이 좋을까? 화이트 와인을 먼저 마시고 레드 와인을 마셔야 한다는 점은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알코올 도수가 낮은 화이트 와인은 맛이 가볍고 산뜻한 반면, 레드 와인은 훨씬 더 강렬하고 복잡한 풍미가 있다. 가벼운 맛을 먼저 즐기고, 점차 진한 맛으로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낸다.
같은 레드/화이트 종류라면, 비싼 와인을 먼저 마셔 보도록 하자. 교과서에서는 때로 반대 방식을 추천하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추천이다. 한 번 30만원 정도의 고가 와인을 아껴 마시기 위해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다가, 술이 많이 오른 상태로 마신 경험이 있다. 상한 포도주스에 소주를 탄 맛이었다.
<샴페인 vs 스파클링 와인>

탄산이 들어 있는 노란 빛깔의 와인을 모두 샴페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샴페인은 프랑스의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만 생산될 수 있는 스파클링 와인의 한 종류라는 점을 알고 있었는가? ‘샴페인’이라는 이름은 법적으로 이 지역에서만 사용할 수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스파클링 와인은 이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 즉, 프랑스를 대표하는 스파클링 와인이 샴페인이라면, 스페인을 대표하는 것은 카바, 이탈리아는 프로세코, 독일은 젠트로 불린다. 이들 모두 같은 종류의 스파클링 와인이지만, 생산되는 지역에 따라 이름이 다를 뿐이다.
<마치며>

필자는 와인도 우리가 대중적으로 즐기는 소주와 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털어 넣으며 회포를 풀 듯, 와인 또한 해외처럼 특별한 날 뿐 아닌 일상 속에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되었으면 한다. 와인이라는 음료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경험을 선사해줄 수 있기에, 그저 특별한 순간에만 국한해 와인을 즐길 이유는 없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와인을 즐기며, 그 향과 맛을 음미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삶의 질이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부록>
*필자 추천 와인 리스트*
(1~5만원 대)
- Piccini Chianti DOCG (피치니 키안티) = 피자와 먹으면 최고
- Killibinbin (킬리빙빙 시리즈) = 강력추천, 보이는 즉시 매수 요망
- 19 Crimes Shiraz (나인틴 크라임스 쉬라즈) = 바닐라 향이 가득, 안주 없이도 좋다
- Decoy (디코이) = 한식이랑 잘 어울리는 와인
- Bread & Butter (브레드앤버터) = 무얼 살지 고민이 될 때는 이놈 만한게 없다
(5~10만원 대)
- Iscay (이스까이) = 콜키지프리 한우 식당에 제격
- Duckhorn (덕혼) = 콜키지프리 한우 식당에 제격
- Gevrey Chambertin Frederic Magnien (쥬브레 샴베르탱) = 프랑스 코스 요리 먹는 날
- Giacomo Fenocchio Busia Barolo (바롤로) = 필자의 인생 와인
(샴페인)
- Veuve Clicquot Brut (뵈브 클리코) = 초밥, 회와 궁합이 훌륭하다
- Krug (크룩) = 마셔보고 싶어서 괜히 적어 본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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